라캉이 땡기는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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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를 찾아가는 라캉의 정신분석
가타오카 이치타케 지음, 임창석 옮김 / 이학사 / 2019년 10월
평점 :
"(52) 물론 증상에는 고유한 고통이 있으며, 증상으로 고통받는 현상을 “그것이 당신답게 사는 방식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완전히 긍정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은 그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불만족스럽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을 안고 있기에 생기는 것이지, 결코 건강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자신만의 ‘사는 방식’을 발견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사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부담에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증상을 제거하여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사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정신분석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가타오카 이치타케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 자체를 멀리하고 경시하는 문화가 싫다. 삶에서 오는 만족감(자신에게 집중하기)을 경험하기 힘든 사회적 조건에서 고통마저 부정하는 것은 그것을 대상화하는 것만큼이나 포르노화하는 것만큼이나 억압적이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는 시구처럼.
지금 당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는 사람과 그래야 하므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선뜻 불만족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온몸으로 불만족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만족에 대한 질량/진정성을 구분할 재간은 없다. 나는 안괜찮으므로 종종 괜찮아?라고 묻게되고 사람들은 대부분 괜찮다고 말한다. 곰곰 사실은 아니, 나도 좀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좋다.
그건 내가 아픈 사람이어서인가? 하고 의심했다.
아니다.
아프다는 것. 자신의 고통을 인식할 만큼까지 스스로를 굳히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살려고 하는 희미한 내 안의 흐느낌을 듣는다는 것이고. 미약한 흐느낌에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나 자신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자체로 가능성이다. 가능성이기에 취약해 보이고 희미하며 어설퍼 보일 테지만.
도약에는 단절이 필요하다. 아니 단절이 필수다. 애벌레와 번데기와 나비 사이에는 도약이전에 명확한 단절이 있다. 내가 번데기인지 애벌레인지는 나도 모른다. 나비가 되어봐야 안다. 나비가 아닐 수도 있다. 나방, 쥐며느리, 개똥벌레 혹은 매미일 수도 있다. 뭐든 자신이 되면 된다.
희미한 목소리에 집중(그것을 내 안의 신호로 인지하기로 결단한)하는 사람은, 이물감과 당혹스러움, 무력감을 괴로움으로 감지하기도 하며, 찬찬히 들여다 보기 위해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야 함을 느낀다. 스스로는 알테다. 너무도 연약하지만 명료한 상태. 나를 구성해오던 내 안의 목소리와 분리되는 기분.
요는 자유와 불안, 고통과 나다움에는 어떤 함수가 있다는 것. 솔닛의 말대로 고통은 자아의 경계이기도 하다. (물론 라캉의 정신분석은 자아가 아닌 주체[무의식적]를 대상으로 하며 자아개념은 탈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없앨 수 없으며 ‘증상’은 고통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통은 고통이기에 대체로 무의식의 영역에 묶여있다. (타자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인식할 수 없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안과 바깥은 정확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다. 내 안은 내 바깥이다. 목구멍부터 똥구멍까지 어쩌면 인간은 하나의 구멍이므로 선명하게 구분하는 것도 오만같다.
주절주절 써대다 보니 글이 길어진다. 이해하기 어려운 게 라캉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이 책의 미덕은 “(7)과도한 도식화를 두려워하지 않음”이므로 책을 추천합니다. 물론 본인의 무의식이 두려운 사람은 안보겠지만 ㅋㅋㅋ
나는 내 무의식에 치열한 편이고… (알기 싫은 것을 모르고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집요하거나 긁어파는 성격(이 없는 건 아님)과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나를 살지 않은 탓으로 고통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은 건강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임을 수월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정상/비정상을 구분하거나 사회의 인정이나 열악한 위치(대체 그것을 누가 평가하는가?) 때문 만은 아니다. 혹자는 스스로 알아서 ‘사는 방식’을 터득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자신이 완전체라면… 대체 왜 사는 거지? 죽음은 인생의 완성이다!)
제 나름의 고유한 사는 방식은 누구도 완벽히 알 수 없으며, 죽을 때까지는 모른다는 것. 모른다는 것 앞에서 겸허해져야 한다는 것. 그렇지만 태어나버린 이상 누구나 자신의 ‘사는 방식’을 발견해야 한다는. 당위로서의 행복/건강/정상의 추구가 아니라 나를 사는 방식. 그것이 증상, 고통의 보다 분명한 존재 이유라는 것을 나는 이제사 아주아주 조금은 알게 되었다 느낀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
고통. 그것을 질환, 병, 박멸해야 할 해충처럼 다루며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지구를 타자화한 현시점의 인류가 바로보지 못하는 거대한 무의식일지도.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
감정(몸의 반응)에는 분명 까닭이 있다.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발견해낸 ‘사는 방식’이라면 사는 방식일 것이다.
그것들을 내쳐온, 보려 하지 않은, 내 안의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음이 정말은 내 무의미한 고통의 의미였음을.
의미의 절단.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 라캉과 관련한 글들을 읽을 때 나는 깊이 위로받는다. 지금의 ‘사는 방식’을 옹호받는 느낌이라 그러하다. 장난처럼 나는 생라캉이라고 농담을 던지지만. 그의 사상이 퍽 마음에 든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저런 현상들 중에 내가 가장 못마땅한 것은 인간 저마다에게 있는 고유한 감정이나 심리적인 숙제들에 라벨링을 붙여 질환으로 여기는 언어의 생산인데…
나 조차도 실은 그런 언어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으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계속 생각을 벼려나가 보마 한다.
나의 불행에 대한 처방이 나의 안정일 수는 없다.
같은 밀도로 나의 행복에 대한 처방이 나의 안정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 언어들은 애초에 같은 언어였겠지.
내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불안정이다. 불안정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균형점을 찾고자 하는 미세한 지점.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나로 사는 방식은 누가 알려주지 않는다. 많이 휘청거리는 것은 독이기도 하고 약이기도 하다. 가장 안정적인 상태는 누워있는 상태지. (물리적으로 나는 오래 누워있는 편이다.) 스우파 2를 동생들과 종종 본다. 아름답고 멋진 춤은 불안정의 안정이다.
- 내가 나한테 너무 미안해요.
나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타인들의 언어로 나를 괴롭힌 나를.
나의 언어 세계는 통증이 인식의 조건이며 가능성이다. 비움이 곧 채움이며. 상처가 곧 사랑이다. 과정에서 오는 성장의 기쁨을 알아가는 중이다.
2023-09-27
정신분석은 주체의 진리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이는 환자의 "문제 행동"을 소멸시키거나 환경에 대한 적응을 통해 자아를 강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오늘날의 이른바 "마음의 치료"와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해관계에 지배되는 지식의 체계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주체의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정신분석의 길입니다.
달리 말하면 정신분석이란 표면적인 제 증상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주체가 "사는 방식"의 핵심을 파고 들어가는 실천입니다. 문제는 진리가 드러나는 단면을 "잘라내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진리를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영역을 넘어선 무의식의 영역이 드러나게 됩니다. -😀 정신분석의 목적 - P6
무의식이 시니피앙으로 구성되는 한 무의식은 시니피앙의 ‘법’에 따라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은 "문법"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결국 무의식은 그저 혼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인 구조를 가지며, 그곳에서는 어떤 규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무의식을 혼돈으로 파악하는 자아 심리학과 라캉의 차이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는 무의식을 억압하고, 이러한 ‘법’을 못 본 척합니다. 나아가 자아는 상상적 인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에 속아 넘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의 목적은 이미지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의 ‘법’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환자를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라캉의 무의식은 언어적인 구조를 가진다. - P151
라캉은 그런 본능론을 일축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그것을하나의 ‘체험’으로 상정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물’의 체험입니다. 향락의 기원은 ‘사물’의 체험에서 유래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우리 모두는 태어남과 동시에 바로 ‘사물’을 체험합니다. 이러한 원초적인 체험을 한 후에 우리는 죽음 충동에 이끌려 향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설명해보겠습니다. ‘사물’의 체험이란 원초적인 만족 체험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 😀 사물의 체험, Ruti 식으로 말하면 큰 사물the Thing의 울림인 듯. - P240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① 자신이 어떤 형태로 향락을 얻을 것인가라는 점이며, 또한 ② 욕망에 의한 변화를 만들려면 어떤 ‘여백’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점으로 이러한 점들이 인생의 의미나 방향을 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환상이란 바로 향락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며, 또한 욕망의 지표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환상이 지시하는 이러한 규정이 인생의 이정표가 되는 셈입니다. 환상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섭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환상이란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종교는 인생의 지향점을 제시해줍니다.
- 😀 아... 정말 도식화 너무 심하게 해서 라캉 다 이해해버린 듯 ㅋ - P263
351 다양한 고통은 결국 모든 인간이 대타자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중략)원래 대타자는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적인 의지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타자는 그 구조상 결코 ‘최고의 행복’을 주지는 않습니다. (중략) 이러한 실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대타자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에 의지 하지 않고 독자적인 "행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특이성"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 😀 내 말로 풀자면 정신분석 최후의 표적은 대타자에게 찔끔찔끔 반항하는 삶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는 이거(아무도 안시킨 돈도 안되는 공부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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